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미키 17》 속 계급·권력·타자, 봉준호가 그리는 우주

by Lucian Yool 2025. 7. 5.

영화 "미키17" 포스터
영화 "미키17"

🎬 제목: 《미키 17》(Mickey 17, 2025)
📅 개봉: 2025년 2월 28일 (한국, 전 세계 최초)
🎥 감독: 봉준호 (Bong Joon Ho)
🖋️ 원작: 소설 『Mickey7』 (Edward Ashton)
🎭 출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애키, 스티븐 연, 토니 콜렛, 마크 러팔로
🏷️ 장르: SF · 드라마 · 스릴러 · 블랙코미디

 

 예고편

 
 

 죽음을 반복하는 존재, 미키 17의 철학

봉준호 감독의 첫 SF 할리우드 진출작인 《미키 17》은 단순한 우주 탐사물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죽음을 반복하는 인간”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배경은 2054년, 인류는 얼음 행성 니플하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합니다. 이때 탐사대의 최하위 계급인 ‘소모형 인간’ 미키 바넘이 등장합니다. 그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며 죽을 때마다 복제된 신체에 기억을 덧입은 새 미키로 재탄생하죠. 제목 속 숫자 17은, 이 복제체가 벌써 17번째라는 뜻입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SF적 상상이 아니라, ‘동일한 기억이 동일한 존재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관객에게 직접 던지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17번째 미키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아와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진짜 무대는 어쩌면 우주가 아니라, 정체성을 향한 내면의 여정일지도 모릅니다.

 

 소모형 인간과 식민지 사회, 그 안의 구조

《미키 17》이 구축한 세계관은 단순한 배경 그 이상입니다. 영화 속 인류는 우주 식민지 개척을 위해 복제인간을 활용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미키 같은 ‘Expendable’은 죽음조차 개인의 자산이 아닌 집단의 도구로 전락하는 사회의 냉혹함을 드러냅니다.


이 체계 속에서 미키는 존재의 가치가 생명이 아니라 기능에 따라 판단된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자신과 동일한 기억을 지닌 또 다른 클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복제체라는 한계를 뚫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서사는 인간 노동, 계급, 자아의 경계 등 봉준호 감독이 꾸준히 천착해온 주제를 우주라는 극단적 배경 속에 다시 세워 놓습니다. 영화는 클론 간의 경쟁과 갈등, 연대를 통해 개인이 집단 속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지워지는지를 날카롭게 비춘다는 점에서 단순한 SF 이상으로 작동합니다.

 

 로버트 패틴슨의 다층적 연기와 정체성 분열

미키 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은 단순한 복제 인간 연기가 아니라, 같은 기억을 가진 서로 다른 인격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각 클론마다 말투, 태도, 반응의 리듬까지 달라야 한다고 주문했고, 패틴슨은 그 요구에 정확히 응답했습니다.


17번째 미키는 의심과 고뇌를 품고 있고, 18번째 미키는 훨씬 무심하고 순응적입니다. 그 차이는 눈빛과 어조, 호흡 조절에서 미묘하게 드러나며, 관객이 “기억은 같지만 인격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연기 설계가 돋보입니다.

특히 두 미키가 마주치는 장면은 기술적 합성 이상의 연기 밀도가 느껴지는 시퀀스입니다. 정체성 혼란을 직접 마주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 영화가 단지 ‘복제’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질적인 나와 마주했을 때, 진짜 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봉준호 감독의 장르 통합과 정치적 유머

《미키 17》은 SF이면서도, 블랙코미디이고, 동시에 정치 풍자극입니다. 감독은 장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채, 미래 사회라는 가면을 씌운 현실 사회의 축소판을 그립니다.


탐사대 지휘자인 ‘케네스 마셜’(마크 러팔로)은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지도자입니다. 봉 감독은 실제 정치인을 모델로 삼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그 성격은 누가 봐도 익숙한 독재형 캐릭터입니다. 영화 속 유머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권력자의 모순과 구조적 폭력을 꼬집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외계 생명체 ‘크리퍼스’와의 관계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힙니다.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과정은, 인류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오만함을 투영합니다. SF의 외피를 쓴 이 작품은 결국, 인간 사회의 구조를 해부하는 봉 감독 특유의 해법을 다시 펼쳐 보이는 셈입니다.

 

 맺으며

《미키 17》은 단지 시각적 SF가 아닙니다. 복제와 반복, 기억과 자아를 둘러싼 이 영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끝에서 철학적 사유를 제안하는 작품입니다.


정재일의 음악은 장르의 이질성을 유연하게 감싸며 극의 감정을 절묘하게 연결해줍니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사유와 오락의 균형을 맞추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설국열차》와 《기생충》을 거쳐, 봉준호 감독은 이제 ‘우주’라는 무대를 통해 인간 존재를 다시 해부합니다. 《미키 17》은 진정한 SF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될 것입니다.